색감이 예쁜 영화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작품이 떠오르십니까? 저는 망설임 없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꼽겠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예쁜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유튜브에서 직접 구매해서 두 번, 세 번 보고 나서야 이 영화가 단순히 예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화면비율이 바뀌는 영화, 보고 계셨습니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한 번만 보신 분들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혹시 영화를 보는 내내 화면 비율이 달라진다는 걸 눈치채셨습니까?
이 영화는 애스펙트 레이쇼(Aspect Ratio), 즉 화면의 가로 대 세로 비율이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에 따라 세 가지로 달라집니다. 애스펙트 레이쇼란 영상이 재생되는 화면의 가로와 세로 길이 비율을 뜻하며, 시대적 느낌이나 영화의 분위기를 시각적으로 규정하는 요소입니다. 감독 웨스 앤더슨은 현재 시점에는 1.85:1의 비율을, 1960년대 장면에는 2.35:1의 와이드스크린 비율을, 그리고 구스타브의 전성기인 1930년대 장면에는 1.33:1의 클래식한 스탠더드 비율을 사용했습니다. 여기서 1.33:1 비율이란 과거 무성영화 시절부터 쓰이던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운 화면 형태로, 흔히 '아카데미 비율'이라고도 불립니다.
제가 처음 봤을 때는 이 변화를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두 번째로 볼 때 비율이 바뀌는 장면에 집중해서 보니, 이게 단순한 연출 기교가 아니라는 걸 느꼈습니다. 화면이 좁아질수록 이야기가 더 오래된 과거로 들어가는 느낌, 마치 오래된 사진첩을 펼치는 것 같은 감각이 살아났습니다. 이 부분만으로도 여러 번 챙겨볼 이유가 충분합니다.
색채 설계(Color Grading) 측면에서도 이 영화는 독보적입니다. 색채 설계란 영상에 인위적으로 색조와 명도, 채도를 조정하여 감정선을 유도하는 후반 작업입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파스텔 계열의 핑크, 퍼플, 크림색을 전면에 깔면서도 특정 장면에서는 돌연 어두운 톤으로 전환합니다. 제가 직접 봐보니 이 명암의 낙차가 꽤 의도적입니다. 구스타브가 감옥에 갇히는 장면이나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장면에서는 색감이 확연히 가라앉고, 보는 저도 모르게 헉 하고 긴장하게 됩니다. 달달하고 화사한 색감에 익숙해진 관객을 방심시킨 뒤 치는 방식입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영상 미학적으로 높이 평가받는 이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시대에 따른 애스펙트 레이쇼(화면 비율)의 의도적 변화
- 파스텔 계열 색채와 갑작스러운 어두운 색조 전환을 통한 감정 조작
- 완벽한 대칭 구도(Symmetrical Composition)로 완성한 프레임 미학
- 빠른 컷 편집으로 구축한 독특한 리듬감
이 영화가 2015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촬영상, 미술상, 의상상, 분장상 등 4개 부문을 수상한 것은 이러한 시각적 설계의 완성도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결과입니다(출처: Academy of Motion Picture Arts and Sciences).
한 번 보고 끝내기엔 너무 아까운 영화
이 영화를 딱 한 번만 보셨다면, 솔직히 말씀드리면 절반 정도밖에 못 보신 겁니다.
저는 처음 관람했을 때 구스타브라는 캐릭터 자체에 집중하느라 배경에 숨겨진 소품과 장치들을 거의 놓쳤습니다. 두 번째부터는 화면 구석구석을 살피게 되는데, 멘들스 과자 상자의 색상이 장면마다 조금씩 다르다는 것, 제로의 표정이 구스타브의 행동에 따라 미묘하게 바뀐다는 것 같은 디테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이른바 미장센(Mise-en-scène)의 촘촘함입니다. 미장센이란 카메라에 담기는 화면 안의 모든 시각적 요소, 즉 배우의 위치, 조명, 소품, 세트 등을 종합적으로 배치하는 연출 개념입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이 미장센이 단 한 프레임도 허투루 구성된 장면이 없다고 느낄 정도입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은 구스타브가 동료 죄수들에게 멘들스 케이크 상자를 건네는 장면입니다. 케이크 안에 탈옥 도구가 숨겨져 있고, 교도관이 그 케이크를 의심 없이 감옥 안으로 들여보냅니다. 이 짧은 장면 하나에 웃음과 긴장이 동시에 담겨 있는데, 제가 직접 여러 번 봐보니 케이크를 자르지 않는 교도관의 표정 연기까지 공들여 설계된 장면이라는 게 보입니다. 또 제로를 보호하기 위해 구스타브가 나서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장면에서 구스타브라는 인물이 단순한 허풍쟁이 지배인이 아니라는 게 드러나는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처음 볼 때는 코미디 캐릭터로만 읽히던 인물이 두 번째 관람부터는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구스타브가 죽는 장면에서 저는 많이 울었습니다. 찔끔이 아니라 진짜로요. 그 전까지 이 영화가 워낙 경쾌하게 달려왔기 때문에, 그 갑작스러운 마무리가 더 크게 와 닿았습니다. 내러티브 구조(Narrative Structure), 즉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에서 이 영화는 현재에서 과거로, 과거 안에서 더 먼 과거로 들어가는 액자식 구성을 택하고 있습니다. 액자식 구성이란 이야기 안에 또 다른 이야기가 중첩되는 서사 방식으로, 독자 혹은 관객이 시간적 거리감을 의식하도록 유도합니다. 이 구조 덕분에 구스타브의 죽음이 더 멀고 쓸쓸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영화의 재관람 가치에 대해 학계와 평단 모두 주목한 바 있습니다. 영화학자들 사이에서 웨스 앤더슨의 작품은 반복 관람을 통해 완성되는 텍스트로 분류되는 경향이 있으며, 그의 세계관과 연출 방식에 대한 학술적 연구가 꾸준히 발표되고 있습니다(출처: BFI British Film Institute).
이 영화는 2018년에 국내 극장에서 재개봉된 적이 있는데, 저는 그 기회를 놓쳤습니다. 지금도 그게 아쉽습니다. 이 영화는 큰 화면으로 봐야 비로소 완성되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파스텔 핑크로 가득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외관을 극장 스크린으로 보는 것과 모니터로 보는 건 분명히 다를 것입니다.
다시 재개봉 기회가 온다면 이번엔 절대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아직 한 번도 보지 않으셨다면 지금 당장 보셔도 되고, 한 번 보셨다면 두 번째 관람을 권합니다. 화면 비율이 언제 바뀌는지, 멘들스 케이크 상자가 어떻게 등장하는지, 구스타브의 눈빛이 언제 바뀌는지, 이것만 챙겨 보셔도 완전히 다른 영화가 됩니다.